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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백산 문승수선생 일대기1

작성자명이**
조회수1799
등록일2009-02-02
이상명내과의 친외조부이신, 어느 항일 운동가가 계셨습니다....

애국지사 문승수 선생의 일대기


  愛國志士(애국지사) 白山(백산) 文升洙 先生 (문승수 선생)은 국운이 기울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 1월 21일 全南 莞島郡 郡外面 (전남 완도군 군외면)대아리 소박한 선비의 집에서 文良俊(문양준)씨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通政大夫(통정대부)이자 士官(사관)을 지낸바 있는 이름 높은 儒學者(유학자)인 呼(호)는 白受(백수)이며 字(자)는 學瑞(학서)이신 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아 유년시절부터 유난히 총명하여 神童 稱號(신동칭호)를 받았으며 1923년 완도공립보통학교를 5년에 졸업하고 곧바로 광주 농업학교에 입학하여 매사에 적극적이고 勇猛(용맹)한 性品(성품)을 지니고 무엇이든 실력으로 해결하려는 信念(신념)을 가졌으며, 修學中(수학중) 침략 당한 이 땅의 젊은이로써 그 서러움과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25년부터 교내에서 정남균, 박인생 선생 등과 함께 학원 내에서 抗日運動(항일운동)의 基盤(기반)을 造成(조성)하고 단결된 힘을 갖게 되어, 광주고보의 왕제일, 장제성, 최규창 선생, 농업학교 박인생, 정남균 선생 등 16명과 모여서 1926년 11월 3일 광주 부동정에 있는 최규창의 하숙집에서 광주학생운동의 뿌리였던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民族(민족)의 혼을 일깨우셨으며 광주사범의 이동선, 하선철, 박무길 선생들도 合流(합류)하였다.   조국의 독립, 日帝 民族差別(일제 민족차별) 植民地 奴隸敎育體制(식민지 노예교육체제) 反對(반대) 및 言論,(언론) 出版(출판)의 自由,(자유) 그리고 착취와 압박으로 인한 비참한 環境(환경)에서 벗어나 일치 단결하여 항일학생운동를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배후에 완도 신지 출신 장석천 선생이 계셨다.)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을 定期集會日(정기집회일)로 정하고 部署(부서)를 각기 맡아 수개월 동안 지속하였으나 회원 중 이탈자가 생겨 비밀누설이 우려되고, 동료 학생인 장재성, 박인성 선생 등의 졸업으로 인하여 組織內容(조직내용)을 轉換(전환)시킬 필요가 있어 1927년 3월에 일단 해체하고 학교별로 組織(조직)을 강화토록 하였다.   선생은 그 후 광주농업학교 학생인 김만복, 김재룡, 유상걸 등과 함께 농업학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그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 후 다시 1928년 2월 광주고보의 최규창, 임주홍, 김광용, 광주농업학교의 문승수, 정종배, 김인수, 주당석, 유치요, 광주사범학교의 이동선, 하선철, 박무길, 정귀석, 임종근 등 13명이 여러번 모임을 갖고 졸업 후에도 사회에 진출하여 상호 연락을 긴밀히 하고 抗日民族運動(항일민족운동)을 계속하기로 하였다.   1928년 4월 농업학교 졸업 후에는 완도의 사립약산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정남균 선생 등과 민족의 장래와 국사를 논의하며 후배양성 및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구속되어 광주형무소에서 모진 拷問(고문)과 獄苦(옥고)를 치르다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 6개월형을 받아 복역하다가 대구복심법원에 항소 1931년 6월 13일 1년형이 確定(확정)되어 獄苦(옥고)를 치루었다.